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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화. 2000. 물리학도, 감자를 만나다
    비단생 스토리 2016. 6. 18. 03:48

    일생의 마지막 문학공모전이라고 생각한 문학동네 소설 응모가 깨끗하게 미끄러진 걸 알고 난 후 한 달 가까이, 밤마다 옥탑방이 있는 옥상을 거닐면서 뭐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농산물 전자상거래였다. 때마침 초고속인터넷이 전국으로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고향인 영월로 돌아가 농산물로 인터넷쇼핑몰을 하면 가족을 부양할 만한 돈벌이는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업계획이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빚을 내어 마련한 사업자금으로 공터에 컨테이너박스 하나를 사무실로 차려놓고 아내와 함께 인터넷쇼핑몰 사업을 시작했다.

    인터넷쇼핑몰 사무실과 6밴 용마

    사무실 겸 작은 창고로 쓰였던 컨테이너 박스

    처음에는 강원도 하면 떠오르는 고랭지배추나 영월고추 등에 초점이 맞춰졌다. 근데 막상 쇼핑몰을 오픈할 11월이 되니 영월에는 배추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밭에서 다 뽑혀진 상태였고, 고추는 미리 몇 백 근을 매입해놓지 않으면 그마저 중간 중간 물량을 확보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애초 구상했던, 주문을 먼저 받아 농가에서 바로 보내도록 하는 직거래 시스템은 막상 현장에 와보니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농가에서 물량이 다 팔려나가기 전에 미리 내가 팔 수 있을 만치 매입을 해놓아야만 주문을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농산물을 미리 매입하려면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게다가 인터넷쇼핑몰만 구축하면 금방 매출이 쭉쭉 오를 줄 알았건만, 오픈한지 한 달 두 달이 지나도록 쇼핑몰 방문객은 하루 10여명이 전부였다. 주문은 하루단위도 아니고 일주일 단위로 보아 10건이 안될 정도로 드문드문 들어왔다. 2천여만 원 빚을 낸 자금은 이미 쇼핑몰 시스템 구축이나 차량 구입, 농산물 선매입 자금 등으로 바닥이 나서 두 달이 지나면서는 생계가 위협받을 정도였다. 한겨울 강추위에 아내와 함께 제천 경매시장에서 귤을 떼어 와서 발전소 인근 길가에서 노점을 해야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으니.

    그렇게 노점장사가 주가 되고 인터넷쇼핑몰이 부수입이 되는 와중에 어떻게 해서든 쇼핑몰을 살려보기 위해 나름대로 머리를 싸매야 했다. 주변의 좋은 농산물을 찾아 구석구석 다녀야 했고 매일 밤마다 컨테이너 박스에서 밤을 새면서 쇼핑몰을 홍보하는 일에 전념해야 했다. 감자를 캐치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맞다, 강원도 하면 감자지. 감자를 팔면 잘 될 거야.

    겨울이라 영월에서는 감자를 구하기 어려워 평창까지 가서 30박스를 구해 와서는 비좁은 컨테이너 박스 안에 잘 모셔두었다. 그러기를 한달 여가 지날 무렵, 열 박스 정도 팔렸을 때였다. 

     "강원도 감자가 왜 이리 분이 안 나는 거죠?"

    게시판에 올라온 어느 고객의 푸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쪄서 먹어보아도 분이 나질 않았다. 초등학교 무렵까지 고향에 살았으니, 그 당시 감자를 으깨어 고추장에 비벼먹은 경험에 비춰보면 뽀얗게 분이 올라와야 정상일 텐데, 그 문제의 감자는 그냥 물컹물컹할 뿐 분은 오르지 않았다. 이 겨울에 평창까지 가서 어렵사리 구해 온 감자가 그렇게 분이 나질 않는다니, 농가에 전화해서 물어보았다. 들려온 대답은 수미감자가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반찬용이라 분이 잘 나지 않는다는. 

    그럼 분나는 감자는 따로 있다는 것인가.

    결국 그 30박스를 파는 데 3개월이나 걸렸다. 2년 후 하루에 100박스 이상씩 팔려나가던 때, 3개월 걸려 30박스를 판매한 이 때의 굴욕적인 일은 두고두고 나와 아내 입에 오르내렸다. 

    감자, 내 인생 후반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감자꽃 군락

    분나는 감자 종자의 감자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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