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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화. 2004. 비와 감자의 이야기
    비단생 스토리 2016. 6. 18. 03:54

    <고객게시판>은 사랑방과 같은 존재였다. 농산물의 특성상 선별에 선별을 거쳐 내보내도 클레임이 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라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소통은 <고객게시판>이 사랑방 역할을 하면서 고객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었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여름철에 장마와 집중호우 등으로 몸살을 겪을 때였다. 아니 그 전에 매년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감자를 만지면서 유난히 비에 민감해져서 그렇게 고약하게 비가 내렸던 해들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감자를 캐야 하는 6월말부터 7월 중순 사이에 날씨가 좋아야 하는데, 장마가 시작되어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그칠 줄 모르고 내리던 때이기도 해서 감자 캐는 일은 언제나 비와의 전쟁이었다.

    2002년 여름.

    그해도 유난히 비가 많았다. 

    6월초부터 감자를 미리 예약 받고 하지 무렵 1차로 감자를 캐서 내보내고 나니, 7월초부터 본격 장마에 접어들며 비가 오기 시작했다. 감자를 추가로 캐서 2차 예약 물량을 내보내야 하는데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설상가상 계속 쏟아지는 비로 인해 급기야 영월시내를 관통하는 동강이 둑방을 넘어 범람할 수준까지 강물은 차오르기 시작했다.

    물에 잠겨들어가는 동강하류 합수머리의 동강철교

    동강 제1교의 위태로운 모습

    둑방이 넘치면 사무실이 있는 컨테이너박스도 물에 잠길 수준인지라, 사무실 집기를 다 빼고 컴퓨터까지 차에 싣고는 피신을 가야 했다. 팔괴 시골집조차 범람하는 강물에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 집으로 가지도 못하고 친지네 집에 가서 물난리를 지켜보고 있는데, 다행히 3일이 지나더니 비가 소강상태를 보이며 그치기 시작했고, 강물은 둑방을 1m 정도 남겨두고 다시 빠지기 시작해 시내가 물에 잠기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피신해 있는 3일 내내 컴퓨터를 할 수가 없어 쇼핑몰 게시판에 어떤 불만글들이 가득할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사무실에 컴퓨터를 설치하고는 쇼핑몰에 들어가 보았다. 예약한 감자가 배달되지 않아 불만글로 가득하리라 예상하고 열어본 <고객게시판>은 의외의 글들로 가득했다.

    때마침 전국적으로도 집중호우가 가장 심했던 영월이었던지라, 동강범람 문제가 9시뉴스에까지 나와서 그런지 게시판의 글들은 감자가 늦게 배달되는 데에 대한 불만글은 한두 개 정도만 보일 뿐, 주인장의 답변도 없는 게시판에 동강범람을 걱정하는 글들로 50여개 빼곡하게 올라와 있었다. 감자가 배달되지 않는다는 불만글에는 다른 고객들이 친절하게 현 상황을 댓글로 설명해주고 있었고, 걱정 릴레이 글들에는 서로서로 댓글로 영월의 홍수 소식을 나누며 안부를 전하고 있었다.

    감자를 먹다가 목이 메는 그 이상으로 가슴 한구석이 꽉 막히는 느낌, 고객감동을 주어야 할 내가 오히려 고객들로부터 감동을 받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고객들과의 친근함은 이웃사촌 그 이상이었다. <고객게시판>은 그렇게 쇼핑몰의 사랑방이 되어 단순히 문의 답변글들이 오가는 공간을 넘어서 시골과 도시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어느새 농산물 쇼핑몰을 시작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벤치마킹 대상이 되어갔다.

    쇼핑몰에서 맺어진 인연으로 일부러 영월까지 여름휴가를 내려오는 가족들과 자리를 함께 하면서 각별한 인연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아래 사진에 소개하는 1박 2일 일정의 감자 캐기, 찰옥수수 꺾기 농장체험 행사는 그 연장선이었다. 

    쇼핑몰 고객들과 함께 하는 찰옥수수 꺾기 농장체험 행사

    20여가족 100명 가까이 참여

    찰옥수수를 꺾고 나서 계곡물에 발 담그고

    2005년 여름.

    7월 한 달 내내 비가 내렸다. 

    정확히는 오고 그치고를 반복했지만 땅이 최소한 3일 정도는 말라주어야 감자를 캘 수가 있는데 그 3일을 못 버티고 비가 오는 바람에 한 달 내내 내린 걸로 기억되는 해였으리라.

    예약 받은 감자를 캘 여유를 주지 않고 내리는 비에 속수무책으로 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미 장마가 시작되기 전 6월에 이른 감자를 캐는 남도지방의 작황이 유난히 좋았던 탓으로 감자값은 바닥을 치고 있을 때였다.

    한 달 내내 캐지 못하던 감자를 7월말 무렵 캐기 시작하니 이미 땅속에서 썩기 시작해서 허연 전분만이 감자가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감자는 건질 게 없었다. 그러던 중 그나마 캔 감자조차도 감자값이 바닥을 기는 덕에 판매하지 못하고 있는 농가들이 많다는 연락이 인근 농협으로부터 들려왔다.

    그 감자는 우리가 수수료도 안 받고 판매해 볼게요.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쇼핑몰에 긴급공지를 올려 200박스 정도를 1만원에 택배비만 받고 판매하는 것으로 긴급처리하기로 하고, 보통 우리가 수매해서 직접 선별 포장하는 것과는 달리 이 건은 생산지에서 선별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해서 200박스를 3일에 걸쳐 모두 완판을 하였고, 감자는 생산지에서 택배를 통해 고객들에게 바로 배달이 되었다.

    하지만.

    며칠 후부터 고객게시판에는 받은 감자가 썩고 있다는 글들이 도배가 되기 시작했다. 수십 건의 불만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이 정도라면 썩어도 그러려니 하고 이해하는 고객들까지 감안하면 200박스가 거의 그렇다고 보아야 했다. 아무래도 캘 시기를 지나는 동안 지속적으로 비가 내려 땅이 마를 틈이 없는 상태에서 감자가 이미 땅속에서 겉만 멀쩡할 뿐 골병이 들었던 것이 원인인 듯했다.

    택배비는 택배비대로 나가고 감자값은 클레임 제기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고객들에게 100% 환불조치를 해주었다. 게시판에 사과글을 올리고 뒷수습하는 데에만 일주일 정도의 추가 시간이 필요했다. 내 손을 거치지 않은 농산물은 두 번 다시 내보내지 않기로 거듭 확인한 사건이었다.  

    여름철 캐야 하는 감자와 여름철 내려야 하는 비, 둘은 그 해 그렇게 색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감자 캐는 날은 이렇게 비가 오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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