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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화. 1993. 곧 쫓겨날 야학의 교실을 구하라
    비단생 스토리 2016. 6. 16. 19:03

    1993년 여름.

    군에 갔다 오기 전 하도 빵구 낸 학점이 많아 여름학기 수강신청까지 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때, 군에 가기 전 2년 동안 애착을 가졌던 야학은 폐교가 기정사실화된 채 이미 지난봄부터 스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시대가 변해 향후 점점 검정고시를 필요로 하는 학생 수가 감소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8월 폐교를 목표로 달려가고 있었다. 학생마저 지난겨울 20여명이던 것이 폐교 얘기가 나오던 3월부터 한두 명씩 빠지더니 5월부터는 아예 1명만이 남아 교실을 지켜주고(?) 있었다.

    무슨 오기가 발동해서일까, 아니면 어떤 의무감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야학을 애써 외면한 채 복학 이후 내 공부 학점 메우기에만 바빴던 지난봄부터의 일을 생각하면 갑작스런 방향전환이 지금까지도 도무지 설명이 되질 않는다.

    8월초 마지막 교사회의에서였다. 8월 중순 있을 중고졸 검정고시 시험을 마지막으로 폐교 수순을 밟기 위한 마지막 회의였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나는 폐교에 찬성하는 교사들은 다 나가라고 큰소리를 치며 폐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1기 교사로 들어와 2년 동안, 고등학교 때 밤을 새워 공부하던 그 이상으로 혼신의 힘을 쏟았던 야학이 막상 폐교를 목전에 두니 도저히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다행히 폐교를 주장하던 임원진들은 나에 비해서는 후임 기수들이라 쉽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순순히 물러서 주었다.

    계속 남아있을 만한 교사들을 학교까지 찾아가며 만나 얘기를 해보니 나 포함 5명이 남게 되었고, 마지막 학생 한분 역시 중졸시험을 패스한 만큼 고졸 공부를 위해 남아달라고 부탁을 하니 교사5명과 학생1명이 남아 야학 명맥을 유지는 할 수 있게 되었다. 

    넘겨받은 야학 통장에는 10여 만원의 잔고만 남아 있었고, 그나마 지난 2년 가까이 무상에 가깝게 사용하고 있던 대동 단독주택 건물은 내년 봄이면 철거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 겨울 이전에 비워줘야 할 형편이었다. 

    도대체 무슨 대책으로 야학폐교를 무산시켰단 말인가.

    야학교사를 새로 모집해야 했고, 학생도 더 모집해야 했다. 거기에 89년 가을 야학 설립 이후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며 교실을 사용하다가 그나마 지난 2년 안착했던 이 대동 단독주택 교실마저 몇 달 안으로 비워줘야 하는 형편에 무슨 돈이 있어 새 교실을 구한단 말인가. 초창기에야 의욕 있는 교사들이 많아 잦은 이사에도 불구하고 똘똘 뭉쳐 수업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이곳 교실에서 떠나야 하는 순간 정말로 문 닫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폐교를 주장하던 교사들은 그 현실을 직시하고 있던 현명한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들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답은 폐교를 앞장서서 반대한 내가 오롯이 제시해야 했다. 

    솔직히 특별한 묘수는 없었다. 일단 부딪쳐 보는 것 외에는.

    8월 한여름 땡볕에 자전거 하나로 대전 시내 대학을 돌아다니며 교사모집 벽보를 붙였다. 거의 일주일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그리고 밤으로는 대동을 비롯해 인근 자양동, 가양동 주택가를 돌며 전봇대마다 학생모집 포스터를 붙이고 다녔다. 다행히 낮으로 혼자 자전거 타고 다니며 벽보 붙이는 일이 딱했던지 동기 교사 한명이 밤으로 벽보 붙이는 일에 동참을 해주었다.

    전화를 받아야 하니 벽보 붙이는 일 외에는 야학에서 잡일을 하며 전화 곁을 지켜야 했다. 휴대폰이 있는 요즘에야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유선전화 외에는 통화할 방법이 없던 그 시절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야학교실로 사용하고 있는 단독주택은 낡을 대로 낡아서 손 볼 곳이 많았다. 교실마다 새로이 벽지를 입히거나 페인트를 칠해야 했고, 깜박거리는 형광등도 갓부터 교체를 해야 했고, 청소를 해도 해도 워낙 낡은 건물이라 빛이 나질 않았지만, 새로운 교사들과 학생들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다 무너져 내릴 듯 한 우중충한 분위기를 벗겨낼 필요가 있었다.

    가을학기는 다가오고, 학점 신청은 잔뜩 해놓았지만 학교에 나갈 틈은 없었다. 기숙사가 있어 학교에 잠이라도 자러 가야 했지만 버스로 1시간이나 가야 하는 거리를 왔다 갔다 하느니, 차라리 야학에서 자는 것이 편했다.

    그렇게 하기를 보름 정도. 9월초 야학 새 학기를 앞두고 교사 15명에 학생이 20명 가까이 모였다. 이 정도 인원이면 일단 야학 유지하기에는 문제없는 규모였다.

    야학 부활의 서막을 올린 입학식

     

    하지만 문제는 결국 교실이었다.

    10월, 야학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자 임원을 맡고 있는 몇몇 교사들과 함께 집주인을 찾아갔다. 내년 봄에 철거할 건물이라면 철거 전까지 만이라도 교실로 사용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 사이에 돈을 모아서 새 교실을 꼭 구하겠노라고. 무슨 마음이 동해서일까. 집주인은 너무도 고맙게 흔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일단 몇 달이라는 시간을 더 벌 수 있었다.

    자, 이제는 교실을 구할 돈을 벌어야 한다.

    야학 설립 이후 초반 2년을 여기저기 쫓겨 다니다시피 하며 이사 다닌 기억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야학의 새 교실을 잡으려면 최소 몇 년은 끄떡없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할 정도로 어지간한 보증금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목표한 금액은 보증금 1천 만원, 규모는 중고등부 2개의 교실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최소 20여 평, 그리고 위치까지 기왕이면 변두리보다는 대전 시내 쪽에 위치해서 대전 어느 곳에서든 교사들이건 학생들이건 버스 갈아타지 않고 올 수 있는 위치로. 그야말로 꿈도 야무졌다.

    이렇듯 대학 2학년, 어떤 막연한 낭만으로 지원했던 야학은 냉혹한 현실로 돌아와 낭만과는 거리가 먼, 미친 듯이 돈을 벌어들여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즈음, 나의 처지는 참으로 한심한 지경이었다. 2개 가지고 있던 수학 과외 지도 자리는 8월부터 야학일에 뛰어다니다 보니 몇 번 못나가게 되면서 자동 해고되었고, 가을학기는 가뭄에 콩 나듯이 수업 출석을 하다가 기어이 10월부터는 야학 교실 구할 돈 벌 생각에 야학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학교에 아예 나가지 않은지가 보름이 지날 무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야학 교실 한켠에 자리를 펴고 자고 있는데, 전화기 벨이 울렸다. 야학이라 밤에 주로 업무가 이루어지는 관계로 아침에 전화 올 이유가 없는 곳인데, 이상하다 생각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지도교수님이었다.

    현대물리학을 가르치고 있던 교수님. 나지막이 물어왔다. 왜 학교에 안 나오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 나지막이 물어왔다. 대체 어떻게 할 거니? 그때 문득 내 입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학교 그만 둘 거예요. 인사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사실 물리학은 나에겐 상당한 매력이었지만 학교시스템에는 불만이 꽤 쌓여 있던 상황이었다. 국비로 운영되는 학교다 보니 당장 돈이 될 만한 과목 위주로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었다. 대학원 LAB역시 말이 물리학이지 레이저니 광통신이니 반도체니 등등, 대부분 응용물리 위주의 LAB시스템에 교수로서는 돈이 되는 연구 위주로 학생들을 돌릴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기초과학에 해당하는 이론물리학을 고집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뭐 아인슈타인처럼 특별히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면 모를까. 대부분 아인슈타인을 꿈꾸고 들어왔다가 그런 구조 속에 길들여져 국가와 기업에 필요한 고급 기술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학교는 그런 식으로 나에게서 결국 멀어지고 말았다. 학교에 더 이상 돌아갈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속이 편했다. 이젠 아무 거리낄 것 없이 야학일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으니. 

    11월에는 교사들과 성탄, 연하카드를 만들어서 판매를 하기로 하였다. 요즘 말하자면 핸드메이드 카드. 그래도 연말연시 카드수요가 상당하던, 아직은 PC통신도 개화되기 전의 시절인지라 연말연시면 상당한 카드가 유통되던 시절이었다.

    11월 한 달 내내 만들었더니 1천장 가까이 나왔다. 1천 원씩 판매하면 1백만 원의 매출이 발생할 터. 

    근데 어떻게 팔지?

    역시 그에 대한 대책은 없이 시작했던 카드 수공업이었다. 

    이듬해 봄, 건물 철거를 앞두고 야학은 다행히 번듯한 교실까지 구하면서 극적으로 살아났다. 새로 지은 4층 건물 4층에 자리 잡았다. 꿈에 그리던 20여 평 규모의 교실, 보증금 1천만 원에 월세 20만원, 그리고 어지간하면 버스 한번 타고 올 수 있는 대전 시내에서 가까운 곳, 개교 5년만이었다.

    1천장을 만들었던 카드는 12월 강추위에 맞서 대학 앞을 돌면서 노점상을 한 결과 700여장을 판매하여 70만원 매출 달성, 이를 시발점으로 야학은 가내수공업으로 변신, 복조리를 만들어 설날 주택가를 돌며 복조리 장사를 하고, 2월 졸업시즌에는 도매시장에 가서 꽃을 떼어와 일일이 꽃다발을 만들어 판매하였다. 거기에다 일일찻집을 1년에 한번 하던 것을 6개월 사이에 두 번이나 열어 티켓 강매를 한 결과 교실이 철거될 이듬해 봄 무렵 무려 500만 원 정도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가자 퇴임교사 모임에서 500만원을 개인 명의로 대출 받아 지원이 들어왔다. 추후 야학에서 단계적으로 갚아나가는 조건으로. 그렇게 보증금 1천만 원은 마련되었고, 야학교실마련 마케팅은 비교적 성공리에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사하는 새교실에 페인트작업을 하고 칸막이 작업하던 날, 1년 가까이 고생이 많았던 몇몇 교사들과 학생들은 번듯한 새교실 안에서 자축연을 열며 눈물을 흘렸다.

    새로 자리잡은 야학 옥상에서 개교기념일 행사

    충남대 궁동 쪽 쪽문앞에서 카드 판매를 마친 후 꼬치와 소주에 추위를 녹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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