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제2화. 1995. 작가 지망생, 연이은 낙방
    비단생 스토리 2016. 6. 18. 01:05

    야학은 학창시절 내내 모범생인 줄 알았던 나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똘기를 발현시켰다. 군에 가기 전 교사 2명과 중앙시장 닭내장탕집에서 소주를 기울이다가 밤 12시경, 누군가의 입에서 부산 태종대에 가자는 제안이  나왔고, 셋은 미리 약속이라도 있었던 듯 대전역으로 걸어가 부산행 새벽기차에 올라 태종대 절벽 아래까지 가서 산낙지에 소주를 기어이 먹고 올라왔다. 하지만 그날은 나의 가을학기 중간고사가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결국 그 중간고사는 올에프였다.

    중간고사 올에프가 자극이 되었는지, 갑자기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지금 읽어보면 유치하기 그지없지만 속에서 끓어오르는 뭔가가 시가 되어 마구마구 샘솟았다. 소설이 써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렇게 군에 가기 전까지 야학은 나의 잠재되어 있던 예술적 기질을 한껏 끌어올려 주었고, 나는 나에게 실제로 예술적 재능이 있다고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야학폐교를 무산시키고 야학 재건에 올인 할 때 학교를 비교적 쉽게 그만 둔 이유 중에는 물리학 핑계도 있었지만, 아마도 나의 예술가적 기질을 너무도 맹신한 것 또한 한몫 했으리라. 까짓것 소설 써서 먹고 살지 뭐, 하는.

    그렇게 내 인생의 새로운 키워드, "소설"이 시작되었다.

    1994년 겨울.

    야학 교실을 마련하고 학사일정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야학에 짙게 내린 나의 그림자를 지우고자 야학교사를 퇴임하고 야학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영월 쪽 고향 인근 산속마을이었다. 사방으로 빙 둘린 산속에 4가구가 모여 있는, 겨울이면 9시에 해가 뜨고 3시에 해가 지는, 낮 시간이 겨우 6시간에 불과한 그런 산속마을이었다. 그곳에 들어가 몇 년이고 틀어박혀 글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하루 종일 산책을 다녀도 말 한마디 걸 사람 만나기 어려운 산속에서 골방에 틀어박힌 채 책읽기, 산책, 글쓰기를 반복하는 생활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겨울 아침 개울에 나가 얼음을 깨고 그 시린 물에 머리를 감고 세수하는 일은 언제나 새로운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인터넷도 되지 않던 당시에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는 라디오였다. 삼풍백화점 붕괴소식을 들은 것도 라디오를 통해서였고,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역시 라디오로 들으며 그나마 세상과의 소통에 만족해야 했다.

    내 글에 영감을 주었던 자칭 글쟁이 전직 기자분과 함께

    하지만 결국 몇 년을 목표로 하고 들어갔던 산속 생활을 1년 만에 접고 내려온 것은 못내 사람이 그리워서였다. 야학에서 매일같이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던 일에 익숙해 있던 정신과 몸은 수도승 같은 산속 생활을 그리 호락호락 허락하지 않았다.

    대전으로 다시 돌아와 머문 곳은 야학이 있는 4층 건물 옥상, 그 한구석에 있는 작은 옥탑방을 얻어 결국 야학 곁을 다시 맴돌게 되었다. 하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학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였고, 당장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한 막노동일을 하며 소설공부를 계속 했다. 하지만 첫아이가 나오자 그마저 여의치 않아 입시학원 수학강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글을 쓰고 신춘문예 응모를 하면서 작가 데뷔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다.

    야학 옥상에 자리잡은 나의 습작시절 옥탑방

    지금은 군대 가있는 큰아들, 그리고 삶의 무게

     

    하지만 그렇게 5년이 흐르는 사이 아이는 더 늘어 당장 돈이 되는 학원생활에 비중을 두어야 하다 보니, 틈틈이 쓰는 소설습작으로 당선소식을 기대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결국 학원강사와 습작생활을 병행한지 5년 만에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 한 학원강사일마저 그만 두고 소설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2000년. 밀레니엄의 해.

    여름 공모전을 6개월 앞두고 아내와 두 아이를 본가가 있는 영월로 먼저 보내고는 혼자 대전에 남아 공모전을 준비했다. 이번에 마저 등단하지 못한다면 소설마저 접겠다는 절필선언을 하면서.

    0과 1의 곰살궂은 대화

    마지막 공모전의 소설 제목이었다. 나의 소설에서 물리학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문학 서적 보는 만큼의 분량을 물리를 비롯한 자연과학 서적에 할애할 정도로 물리학은 나의 소설에서 세계관을 투영하는 프리즘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대중성 확보에는 불리한 것이었을까. 결국 숫자 0과 1의 대화를 통해 파이값의 비밀을 밝혀가는 내용의 마지막 공모전 역시 미끄러질 수밖에 없었다.

    목표한 성적에 도달하기만 하면 되는 학교 공부와 심사위원이건 독자건 누군가의 감성을 만족시켜야 하는 소설은 전혀 다른 공부였다. 소설은 또 다른 차원의 공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공부에 적절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야 했다.

    습작노트로 쓰이던 16절지 갱지들을 박스에 모두 주워 담아 손길 닿기 어려운 곳에 처박아 두고, 컴퓨터에 보관된 습작소설 역시 모두 지워버렸다. 다시는 소설을 쳐다보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 

    돈을 제대로 못 벌어와 고생하고 있는 아내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왜 나와 결혼했냐고.

    소설 쓰면 대박 날 줄 알았죠.

    요즘 작가들이 들으면 그야말로 실소할 일이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그리 허황된 꿈은 아니었다. 베스트셀러가 화려하게 신문지상을 장식하고 아직 인터넷은 PC통신 수준으로 초고속이 보급되기 전이었고, 동네서점도 살아있을 무렵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탈출을 빨리 잘 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Designed by Tistory.